한식당

Life/Diary 2015. 9. 30. 17:54

출처: http://noproblemyourlife.tistory.com/entry/%ED%95%9C%EA%B5%AD%EC%9D%B8%EC%9D%B4-%EC%82%AC%EB%9E%91%ED%95%98%EB%8A%94-%EC%98%A4%EB%9E%98%EB%90%9C-%ED%95%9C%EC%8B%9D%EB%8B%B9-100%EC%84%A0-%EB%86%8D%EB%A6%BC%EC%88%98%EC%82%B0%EC%8B%9D%ED%92%88%EB%B6%80%EC%99%80-%ED%95%9C%EC%8B%9D%EC%9E%AC%EB%8B%A8-%EC%84%A0%EC%A0%95


      (업소명) - - - - - - - - - - (주메뉴) - (개업년도) - (주소)

001. 이문설농탕 - - - - - - - - - - 설렁탕 - - -1904 - 서울 종로구

002. 하얀집 - - - - - - - - - - - - 곰탕, 수육 - 1910 - 전남 나주시

003. 내호냉명 - - - - - - - - - - - 함흥냉면 - -1919 - 부산 남구

004. 박달집 - - - - - - - - - - - - 전통개장국 - 1920 - 부산 금정구

005. 안일옥 - - - - - - - - - - - - 설렁탕 - - - 1920 - 경기 안성시

006. 함양집 - - - - - - - - - - - - 전통비빔밥 - 1924 - 울산 남구

007. 천일식당 - - - - - - - - - - - 떡갈비 - - -1924 - 전남 해남군

008. 형제 추어탕 - - - - - - - - - 추어탕 - - -1026 - 서울 종로구

009. 천황식당 - - - - - - - - - - - 진주비빔밥 - 1927 - 경남 진주

010. 기장곰장어 - - - - - - - - - - 짚불곰장어 - 1929 - 부산 기장군

011. 삼대광양불고기집 - - - - - - 불고기 - 1930 - 전남 광양시

012. 황산옥 - - - - - - - - - - - - 생복찜 - 1931 - 충남 논산시

013. 신식당 - - - - - - - - - - - - 떡갈비 - 1932 - 전남 담양군

014. 용금옥 - - - - - - - - - - - - 추탕 - 1932 - 서울 중구

015. 은호식당 - - - - - - - - - - - 꼬리토막 - 1932 - 서울 중구

016. 곰보추탕 - - - - - - - - - - - 추탕 - 1933 - 서울 동대문구

017. 잼배옥 - - - - - - - - - - - - 설렁탕 - 1933 - 서울 중구

018. 연춘 - - - - - - - - - - - - - 장어구이 - 1936 - 충남 아산시

019. 청진옥 - - - - - - - - - - - - 해장국 - 1937 - 서울 종로구

020. 진주회관 - - - - - - - - - - - 불고기 - 1939 - 충남 천안시

021. 하동관 - - - - - - - - - - - - 곰탕 - 1939 - 서울 중구

022. 한일관 - - - - - - - - - - - - 불고기, 냉면 - 1939 - 서울 강남구

023. 동래할매파전 - - - - - - - - 동래파전 - 1940 - 부산 동래구

024. 영명식당 - - - - - - - - - - - 갈낙탕 - 1940 - 전남 영암군

025. 옥천옥 - - - - - - - - - - - -  설렁탕 - 1941 - 서울 동대문구

026. 소복식당 - - - - - - - - - - - 소갈비 - 1942 - 충남 예산군

027. 할머니집 - - - - - - - - - - - 소머리국밥 - 1943 - 경기 오산시

028. 전통경주할매집 - - - - - - - 쌈밥정식 - 1944 - 경북 경주시

029. 남성식당 - - - - - - - - - - - 복국 - 1945 - 경남 창원시

030. 삼백집 - - - - - - - - - - - - 콩나물국밥 - 1945 - 전북 전주시

031. 평양옥 - - - - - - - - - - - -  해장국 - 1945 - 인천 중구

032. 하연옥 - - - - - - - - - - - - 진주물냉면 - 1945 - 경남 진주시

033. 국일따로국밥 - - - - - - - - - 따로국밥 - 1946 - 대구 중구

034. 송정3대국밥 - - - - - - - - - 돼지국밥 - 1946 - 부산 주산진구

035. 우래옥 - - - - - - - - - - - - 평양냉면 - 1946 - 서울 중구

036. 할머니묵집 - - - - - - - - - - 묵밥 - 1946 - 대전 유성구

037. 부여집 - - - - - - - - - - - - 꼬리곰탕 - 1947 - 서울 영등포구

038. 강서면옥 - - - - - - - - - - - 평양냉면 - 1948 - 서울 중구

039. 옥돌집 - - - - - - - - - - - - - 불고기 -1948 - 서울 성북구

040. 육거리곰탕 - - - - - - - - - - 곰탕 - 1948 - 경남 진주시

041. 원조창평시장국밥 - - - - - - - 국밥 - 1949 - 전남 담양군

042. 경희식당 - - - - - - - - - - - - 한정식 - 1950 - 충북 보은군

043. 급행장 - - - - - - - - - - - - - 소갈비구이 - 1950 - 부산 부산진구

044. 명동할매낙지 - - - - - - - - - 낙지백반 - 1950 - 서울 중구

045. 진주집 - - - - - - - - - - - -  꼬리곰탕 - 1950 - 서울 중구

046. 포항할매집 - - - - - - - - - - 곰탕 - 1950 - 경북 영천시

047. 강산면옥 - - - - - - - - - - - 물냉면 - 1951 - 대구 중구

048. 고래고기원조할매집 - - - - - 고래수육 - 1951 - 울산 남구

049. 불로식당 - - - - - - - - - - - 한정식 - 1951 - 경남 창원시

050. 천안곰탕 - - - - - - - - - - - 곰탕 - 1951 - 부산 중구

051. 평양옥 - - - - - - - - - - - - 영양탕 - 1951 - 대전 서구

052. 호동식당 - - - - - - - - - - - 복국 - 1951 - 경남 통영시

053. 국일식당 - - - - - - - - - - - 꼬막정식 - 1952 - 전남 보성군

054. 문화옥 - - - - - - - - - - - - - 설렁탕 - 1952 - 서울 중구

055. 옥천냉면 - - - - - - - - - - - 냉면 - 1952 - 경기 양평군

056. 이학식당 - - - - - - - - - - - - 따로국밥 - 1952 - 충남 공주시

057. 평양냉면 - - - - - - - - - - - - 냉면 - 1952 - 충남 천안시

058. 한국집 - - - - - - - - - - - - - 육회비빔밥 - 1952 - 전북 전주시

059. 다신식당 - - - - - - - - - - - - 가리국밥 - 1953 - 강원 속초시

060. 연남서식당 - - - - - - - - - - 소갈비 - 1953 - 서울 마포구

061. 옛집식당 - - - - - - - - - - - 육개장 - 1953 - 대구 중구

062. 우리옥 - - - - - - - - - - - - 백반 - 1953 - 인천 강화군

063. 원산면옥 - - - - - - - - - - - 냉면 - 1953 - 부산 중구

064. 하동집 - - - - - - - - - - - - 복국 - 1953 - 경남 진주시

065. 한일관 - - - - - - - - - - - - 한정식, 전주비빔밥 - 1954 - 전북 전주시

066. 고성회관 - - - - - - - - - - - 오징어순대 - 1955 - 강원 속초시

067. 남들갈비 - - - - - - - - - - - - 돼지갈비 - 1955 - 충북 청주시

068. 소문난3대할매김밥집 - - - - - 충무김밥 - 1955 - 경남 통영시

069. 새진주식당 - - - - - - - - - - 비빔밥 - 1955 - 부산 중구

070. 시내식당 - - - - - - - - - - - 광양불고기 - 1955 - 전남 광양시

071. 옥산장날순대 - - - - - - - - 순대국밥 - 1955 - 충북 청원군

072. 경주원조콩국 - - - - - - - - -  콩국수 - 1956 - 경북 경주시

073. 대들보함흥냉면 - - - - - - - - 냉면 - 1956 - 대전 중구

074. 마포진짜원조최대포 - - - - - 돼지갈비 - 1956 - 서울 마포구

075. 송원관 - - - - - - - - - - - -  떡갈비 - 1956 - 경기 동두천시

076. 양산도집 - - - - - - - - - - - 민물장어구이 - 1956 - 부산 사상구

077. 열차집 - - - - - - - - - - - - 빈대떡 - 1956 - 서울 종로구

078. 목리장어센터 - - - - - - - - 장어구이 - 1957 - 전남 강진군

079. 삼거리먼지막순대국 - - - - 순대국 - 1957 - 서울 영등포구

080. 상주식당 - - - - - - - - - - 추어탕 - 1957- 대구 중구

081. 가선식당 - - - - - - - - -  어죽 - 1958 - 충북 영동군

082. 리정식당 - - - - - - - - - - 육개장 - 1958 - 충북 청주시

083. 백번집 - - - - - - - - - - - 한정식 - 1958 - 전북 전주시

084. 오장동함흥냉면 - - - - - - 냉면 - 1958 - 서울 중구

085. 완도횟집 - - - - - - - - - 생선회 - 1958 - 전남 강진군

086. 태조감자국 - - - - - - - - 감자국 - 1958 - 서울 성북구

087. 구포집 - - - - - - - - - -  회비빔밥 - 1959 - 부산 중구

088. 새집추어탕 - - - - - - -  추어숙회 - 1959 - 전북 남원시

089. 전주중앙회관 - - - - - - 곱돌비빔밥 - 1959 - 서울 중구

090. 고려삼계탕 - - - - - - -  삼계탕 - 1960 - 서울 중구

091. 두암식당 - - - - - - -  -  짚불구이 - 1960 - 전남 무안군

092. 함흥곰보냉면 - - - - - -  냉면 - 1960 - 서울 종로구

093. 명월집 - - - - - - - - - - 백반 - 1962 - 인천 중구

094. 역전회관 - - - - - - - - - 바싹불고기 - 1962 - 서울 마포구

095. 진주회관 - - - - - - - - - 콩국수 - 1962 - 서울 중구

096. 편대장영화식당 - - - - - 육회 - 1962 - 경북 영천시

097. 덕인관 - - - - - - - - -  떡갈비 - 1963 - 전남 담양군

098. 진짜초가집원조아구찜 - 아구찜 - 1965 - 경남 마산시

099. 버들식당 - - - - - - - -  곱창 - 1967 - 대구 달서구

100. 청화집 - - - - - - - - -  순대 - 1967 - 충남 천안시


Posted by 독뽀
,


덜덜..

근데 홀로그램은 언제 되냐? -_-

'Life > News - 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게이머가 세상을 구하는 방법  (0) 2010.09.02
VS2010 정식버전 발매 4/12  (0) 2010.04.13
Posted by 독뽀
,

오늘 좀 흥미로운 발표를 보았다..






대학원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동안 현실보다 긍정적이게 되는 이유에 대한 연구를 했던
한 게임 디자이너가 말하는 게임에 대한 발표였다.

이 디자이너는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전세계 게임 인구가 15억명, 10년 후 10억명이 더해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위에서 말한 특이한 점을 찾아낸다면 25억명이 가진 인적자원(Human Resources)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럼 그 특이한 점들이 무엇인고 하니..

1. 즉시적 낙관주의 (Urgent Optimism)
- 극도의 자발성. 어떤 장애물에 대해 성공에 대한 합리적인 희망을 가지고 즉시 도전하려는 욕구
- 게이머들은 승리에 대한 욕구가 강하고,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시도한다.

2. 사회망 (Social Fabric)
- 튼튼한 사회망을 엮는 능력. 서로를 물어 뜯는 게임이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게임을 하면 서로 더 좋아한다는
잦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설명.
- 여러 사람과 함께하려면 믿음이 필요하고 서로 같은 규칙으로 플레이하고 같은 목표에 가치를 두고 끝까지 함께 할 거라고 믿는다.
- 이렇게 함께 게임을 하는 것이 실제로 유대와 신뢰, 협력을 구축한다. 결과적으로 더 강한 사회적 관계를 구축.

3. 행복한 생산성 (Blissful Productivity)
- 놀러가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열심히 게임을 하는 데 더 행복하게 느낌.
- 게이머들은 적절한 일을 부여받으면, 계속 열심히 일할 의향이 생김.

4. 웅대한 의미 (Epic Meaning)
- 게이머들은 행성급 이야기의 장엄한 임무에 연관되는 것을 좋아함.

5. 극한의 자율성을 부여받은 희망적인 개인 (Super-empowered Hopeful Individuals)
- 이들은 모두 스스로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가상 세계에만 국한.

발표자가 얘기하는 것은 이를 "현실에서 적용된 사례가 이미 있었거나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였다.

 2,500년 전 양의 관절뼈로 만든 주사위 - 최초의 게임 장비 - 에 대한 역사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르도토스는 리디아 왕국이 기근 속에서 게임을 발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리디아 왕국은 지독한 기근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식량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리디아의 왕은 미친 짓을 하기로 결정한다. 하루는 밥을 먹고, 하루는 게임을 하게 하여 게임을 하는 동안 몰입하게 되어 배고픔을 잊게 만들어 기근을 잠시 잊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사위 게임은 국민들이 집중하기에 충분히 재미있었고 하루는 밥을 먹고 하루는 게임을 하게 하는 정책이 정확히 성공했다고 한다. 그것도 18년 동안이나..
 하지만 헤르도토스에 따르면 그렇게 보낸 18년이 지난 후에도 기근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마지막 주사위 게임을 하기로 한다. 왕국 전체를 절반으로 나누어 게임의 승자는 리디아를 떠나 웅대한 모험을 떠나게 된는 식이었다. 왕국에는 남은 자원으로 살아갈 만큼의 사람만 남게 되는 것.. 어떻게든 문명을 번창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미친짓 같지만 과학자들은 로마 제국을 이끈 에트루리아 사람들이 고대 리디아 사람들과 정확히 같은 DNA를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즉, 사실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발표자는 자신이 속한 미래 연구소(Institute for future)에서 개발한 게임의 예시를 든다.

1. 석유가 없는 세상 (World Without Oil)
- 게임 속에서 석유가 없다는 전제로 거주 지역을 입력하면 실시간 뉴스 등을 제공하며 그 곳에서 석유가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식품 공급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 교통은 어떤 영향을 받는지, 학교는 어떤지, 폭동이 있는지 등을 보여주며 게임은 시작된다. 게이머는 그 상황에서 진짜 삶을 어떻게 살 지 계산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블로그에 올리고 영상과 사진을 올리게 한다. 2007년에 1,700명의 플레이어와 이 게임을 시험했다고 한다. 게임 이후 3년간 그들을 추적한 결과, 게임이 변화를 불렀다고 한다. 게이머들은 실 생활에서도 그 게임을 할 때의 습관들을 유지했다고 한다. 실험이 성공적이었던 것.. 그래서 다음 게임에서는 석유보다 더 중요하고 큰 문제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2. 슈퍼스트럭트 (Superstruct)
- 게임의 전제는 슈퍼컴퓨터가 인류의 생존이 23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게이머는 한 섬에 모여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에너지의 미래, 식량의 미래, 건강의 미래, 안보의 미래, 사회보장망의 미래를 발명하는 것이 각자의 몫으로 정해진다. 8주 동안 8,000명의 게이머와 게임이 진행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500가지 창조적인 해법을 내놓았다고 한다.

마지막 Evoke라는 게임은 지구를 구할 새로운 기구(조직)들을 만들어나가는 것인데,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TED에서는 현실 도입 가능성에 대해 게임을 하는 목적에 몇 가지 수정과 보완할 점이 있다고 말했다.




난 이 발표가 참 흥미로웠다. 게이머들을 그냥 잉여로 보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게임 앞에 계속 앉게 되는 원인과 그들이 사회에 기여할 할 수는 없을까라는 참신한 시각.. 간만에 집중해서 봤다..


'Life > News - 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HCI - 제스처 기반 컴퓨팅  (0) 2010.09.18
VS2010 정식버전 발매 4/12  (0) 2010.04.13
Posted by 독뽀
,

출처 : http://www.newdaily.co.kr/html/article/2010/08/27/ART55076.html

읽어볼만 해서 긁어다붙임, 문제될 시 연락주세요, 바로 블라인드 조치 취하겠습니다.

저자 :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 (추측;)

<칼럼> 독일 완전 속죄가 'EU 신뢰체제' 구축
일본의 총체적 속죄만이 원한-의심 풀게될 것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탄을 완료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29일 이를 공포했다.
꼭 100년 전이다. 그 후 한국, 일본, 중국이 함께하는 동아시아의 역사는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저항, 협력과 갈등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상호 신뢰성을 회복치 못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철학자 콜링우드(R.G.Collingwood)는 “지난날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오늘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고, 또 내일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소중히 되새기고, 그 교훈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의 100년을 설계해야 할 것이다.

아픔의 기억

일본 정부가 한국병탄을 공식으로 발표하는 아침, 병탄의 주역이었던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는 언론사 대표들을 공관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그동안 정부가 진행한 병탄과정을 브리핑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이 조선 병탄을 단행하게 된 원인은 “동양화란(東洋禍亂)의 뿌리를 영원히 제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병합의 결과”로 “조선인의 복리가 증진되고, 일한일가(日韓一家)를 이루고, 동양평화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언론의 역할을 당부했다(<讀賣新聞> 1910.8.30). 그러나 지나온 10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병탄의 결과는 고무라의 예상과는 정 반대방향으로 전개됐다.
1910년 이후 지속된 35년의 식민지시대를 보내면서 한국사회는 저항과 굴종 속에서 피식민지인으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일가’를 이루기보다는 한국인에게 일본을 향한 증오와 불신의 씨를 뿌려주었다. 그리고 동아시아는 전장(戰場)으로 변했다.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를 ‘식민 전체주의(colonial totalitarianism)’라고 규정하고 있는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정책은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식민통치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1968). 물리적 억압을 넘어, 언어와 역사의 소멸은 물론, 창씨개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민족 말살 그 자체를 시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뿌리가 깊고 철저했다 

‘가혹’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은 저항과 굴종으로 나타났다. 식민지 치하에서 한민족이 보낸 35년은 저항과 투쟁의 역사였다. 저항에 대한 일본의 탄압과 회유가 계속됐지만, 국내외에서 전개된 크고 작은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국인의 저항의 강도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탄압의 강도를 조절하며 때로는 회유책, 때로는 강압적 지배, 또 때로는 문화통치를 구사했다. 그러나 일관된 목표는 ‘반도인(半島人)을 충량(忠良)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일본인화였다.

저항의 반대편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굴종과 동조 또한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식민지배는 본질적으로 협력자를 필요로 한다. 일본은 회유와 억압의 기제를 동원하여 동조세력을 개발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하여 민족분열을 조장했다. 피식민지인의 아픔을 체험한 알제리의 알버트 멤미(Albert Memmi)가 절절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식민통치를 경험한 피지배자가 겪어야 할 가장 큰 고통의 하나는 식민지배 시대를 지나면서 ‘내면화’된 동족사이의 ‘분열’이다(The Colonizer and the Colonized, 1965).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36년의 식민시대를 지내면서 한민족은 일본에 대한 저항과 영합으로 분열됐고, 그 분열의 후유증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100년이 지난 오늘도 ‘친일파 단죄’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음이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1945년 식민지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일본에 대한 미움과 불신, 그리고 내면화된 분열이라는 2중의 고통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단절의 세월

1945년 일본의 패망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심대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한민족은 36년이라는 긴 식민지 시대를 마감했으나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데 실패했다.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됐고, 갈라진 한민족은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그 분단은 65년이 지난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냉전은 종식됐으나, 최근의 ‘천안함 사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냉전의 먹구름은 여전히 한반도를 덮고 있다. 식민지 시대가 남겨준 또 하나의 유산이다.

식민통치의 주체였던 일본은 주권을 상실하고 피점령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일본은 7년이라는 피점령 시대를 거쳐 1952년 주권독립국가로 다시 국제사회에 등장했다. 과거 식민지였던 한반도에서 일어난 동족상잔의 전쟁은 요시다 시게루의 표현을 빌리면 일본에게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였다. 일본은 이를 밑받침으로 1956년에 이르러 이미 전후부흥의 단계를 끝낼 수 있었다.

분단 한국과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이루어 내는 데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해방과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라는 격심한 사회적 진통을 체험한 한국이나, 패전과 점령통치와 전후복구에 매달린 일본은 서로 상대방에 대한 필요성을 긴박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단절의 세월이 길어진 보다 중요한 원인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한국은 어제까지만 해도 가혹한 지배자였던 일본을 ‘교류’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준비되지 않았다.

더하여,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인식의 괴리는 정부차원의 대화도 어렵게 만들었다.
이승만은 일본에게 “과거의 비행에 대한 뉘우침과 이 시점 이후 우리와 공정하게 대하겠다는 새로운 각오와 관련한 구체적이고도 건설적인 증거”를 요구했다. 이대통령이 제시한 교류의 전제는 다만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의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은 이와 달랐다. 소위 ‘망언(妄言)의 효시(嚆矢)’로 알려진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36년에 걸친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국민에게 유익”했다는 것이 일본의 본심이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은 우여곡절 끝에 관계정상화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
이는 상호 필요성과 시대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한국의 국가목표와, 해외시장 확보와 아시아에서의 위상확립이라는 일본의 국가목표가 일치했다. 또한 냉전이라는 국제질서와 그 속에서 세계전략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이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국민화해와 과거청산이라는 본질을 비켜가면서 현실적 필요성에 매달려 이루어진 국교정상화는 그 후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협력과 갈등

국교정상화 이후 45년의 한일관계는 협력과 갈등, 긴장과 협조의 연속이었다. ‘선린관계’와 ‘공동의 이익’을 기약하면서 출발했지만, 그동안 끊임없는 마찰과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일본 지배층의 ‘망언’,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시도, 종군위안부, 역사교과서, 독도 영유권 등과 같은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한국과 일본의 국민감정은 부딪치곤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갈등과 마찰 속에서도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문화적으로 상호 긴밀한 교류를 발전시켜왔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1년에 5백만 명 이상의 양국민이 왕래하고, 700억 달러 이상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현실이 한일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국민감정은 여전히 ‘배일(排日)’과 ‘혐한(嫌韓)’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아무리 참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라도 세월이 흐르고 그것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사라져감에 따라 그 아픔과 슬픔은 엷어지고 지워져가는 법이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은 예외인 것 같다.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세기가 바뀌어도 역사적 아픔과 일본에 대한 불신은 여전히 한국인의 가슴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인의 반일감정도 세월과 함께 잊혀져가고 순화되는 것 같아도, 심층에서 내연하고 있고, 그동안 기회마다 보여주었듯이 언제든지 계기만 있으면 폭발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 세기라는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무엇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그처럼 사그라질 줄 모르는 반일적인 정서를 만들게 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과거사가 지난날의 역사로 정리되지 않고, ‘현재의 역사’로 오늘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로서의 일본은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립(鼎立)’의 동아시아

한국병탄 100년을 맞이하는 2010년은 일본의 패망 65년과 한일국교정상화 45년, 일중전쟁 70년과 일중국교회복 38년과 겹친다. 이 ‘매듭의 때’를 맞아, 한일관계를 넘어 동아시아라는 좀 더 넓은 차원의 미래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만들어 온 지난 한 세기의 이곳 역사가 미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문화적 유산, 광대한 영토와 인구, 거대한 경제규모와 높은 기술 축적을 보유한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가 함께하고 있는 동아시아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굴절과 고난이라는 100년의 역사를 지나왔으나, 세 나라 모두가 그 가능성을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동아시아는 EU나 NAFTA를 넘어서거나 또는 대등한 하나의 축으로 작동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침략과 저항, 협조와 갈등으로 점철된 지난 한 세기의 동아시아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은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가 역사적 자산과 민족적 능력을 합하여 공동의 번영과 평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 나라가 가야할 최선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여전히 불신과 반목이 짙게 깔려있고, 그래서 실천가능한 공동체 구축을 위해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물론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근원은, 대단히 진부한 주제이기도 하지만, 역시 과거에 대한 ‘역사인식’과 ‘과거청산’이라는 문제에 귀착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나라는 지난날 ‘아픔의 역사’를 아직 해원(解寃)하지 못하고 있다. 갈등의 원인을 안고 있고, 상호 불신의 그림자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공동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공동체 논의가 무성하지만 그 실현이 마치 신기루처럼 저 멀리 보이기만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연유 때문이다.
 
오늘의 유럽공동체(EU)를 바라보면서도 때때로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밑에 깔려 있는 상호신뢰감이다. EU를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자산은 독일과 이웃, 특히 프랑스나 폴란드와 같은 나라와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이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치의 비인도적 행위를 부정하고, 자국 중심적으로 역사해석을 고집했다면 결코 EU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날의 잘못된 역사를 단지 “과거의 것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먼 훗날 수정되거나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누구나 지난날에 대하여 눈을 감고 외면하는 자는 현재에도 눈을 감는다”는 바이츠제커적(的) 역사인식과 확신,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중단 없는 행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을 기억 할 필요가 있다(Richard von Weizsaker 독일대통령의 종전 40주년 기념연설, 1985.5.8).

지난날의 아픔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워 지기 위해서는 그 아픔의 역사를 정리해야만 한다.
‘과거청산’의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는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가 좀 더 깊이 논의하고 검토해야 하겠지만, 과거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담은 서로 납득할 수 있는 합의문을 세 나라가 공동으로 채택하여 이를 각국의 국민을 대변하는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방안도 하나의 대안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
북한과 일본의 관계정상화도 이러한 틀 속에서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일본은 100년 전 동아시아 변방의 작은 섬나라에서 근대산업국가로 발 돋음하는 능력을 보였다. 최소한의 사회적 충격 속에서 서양문명을 수용하여 체제를 안정시키고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패전의 잿더미에서 경제대국과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는 저력을 보였다. 일본은 능력과 경험과 자산을 가지고 있는 민족임을 역사에서 입증했다. 21세기 동아시아의 지도자로서 일본의 역할 또한 막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분쟁의 시발점인 한국병탄으로부터 100년, 군국주의의 종말이라 할 수 있는 패전으로부터 65년을 맞이하는 오늘도 가장 가까운 이웃이며 중요한 협력자인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왜일까를 깊이 성찰하고, 진정한 화해의 길을 앞장서서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 또한 일본과 맺어진 ‘과거사’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오늘의 한국은 그동안 식민지시대의 암울한 역사의 그림자와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불행을 극복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OECD의 회원이 됐고, 세계10위권의 경제국가로 성장했고, 인공위성을 쏴 올리는 국가로 우뚝 섰다. 중국 또한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G2의 자리에 이르렀고, 국제질서의 한가운데 서 있다. 한국이나 중국은 이제 자긍심을 가지고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품고, 일본에 대해서도 보다 너그러워질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지난날의 역사적 사실을 잊을 수도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너무 집착하고 그것에 구속되어 밝은 미래를 어둡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근대 일본건설의 주역이었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1825-1883)의 말을 다시 음미해보자.
격동기인 메이지(明治) 초기의 중심인물이었던 그는 유신 다음해인 1869년 “조선과 청국은 예부터 일본과 좋은 관계를 맺어온 이웃[隣國]”이라고 규정하고, “일본-조선-청나라의 연대[鼎立]”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일본이 취해야 할 국가진로의 근본이라고 강조했다(“外交之事”, 1869). 물론 그 후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를 침략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와쿠라가 제시했던 그 정신은 지금도 유효하고, 일본은 이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야 할 역사적 부채를 안고 있다.

Posted by 독뽀
,

대학생들은 아래 사이트에서 Professional 버전 무료 사용이 가능하다.

www.dreamspark.com

프로젝트 관리나 모델링에 더 큰 비중을 두어 VS를 사용할게 아니라면
Ultimate이 탐나긴 하지만 Professional도 무리는 없다!

라이센스 구입이나 정식버전 사용자는 아래의 msdn 홈페이지로~

www.msdn.com

'Life > News - IT' 카테고리의 다른 글

HCI - 제스처 기반 컴퓨팅  (0) 2010.09.18
게이머가 세상을 구하는 방법  (0) 2010.09.02
Posted by 독뽀
,